후지산을 바라보며, 나를 마주하다

2025. 4. 9. 13:5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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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고요함’에 감탄했던 순간이 있다면,

바로 후지산 앞에 섰을 때였다.
후지산은 사진 속에서, 그림 속에서 수도 없이 보았지만,
직접 마주한 그날의 풍경은 내 모든 상상보다 더 웅장하고, 더 조용하고, 더 따뜻했다.

그날,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가와구치호 위로 비치는 후지산의 반영이 잔물결에도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
눈 덮인 후지산 정상은 구름 위로 솟아올라 있었고, 어쩌면 그곳은 신의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후지산을 보았을 땐, 그냥 ‘멋지다’는 말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니, 후지산은 말 없이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어디쯤 서 있니?"

여행은 늘 외부를 향해 떠나는 것이지만,
후지산 앞에서는 오히려 내면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삶의 방향은 어디인지
차분히 되묻게 만드는 무언의 기운.

어떤 이에게는 후지산이 정복의 대상일지 모른다.
등산 장비를 챙기고, 해가 뜨기 전부터 출발해, 수 시간의 고된 오름 끝에 만나는 정상.
하지만 나에게 후지산은,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되는 산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그 자체로 충분했기에.
그저 고요히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
그게 후지산이 가진 힘이 아닐까.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말없이 바라보는 순간의 힘.
그건 일상 속에서 자주 잊고 사는 감각이었다.

그날 이후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나는 후지산을 떠올린다.
머릿속으로 그 흰 정상을 그리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한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그런 '후지산' 하나쯤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소리 없이 묻고, 조용히 바라봐 주는, 그런 존재.